[살인자의기억법] 김영하의 트릭(trick)

2013. 9. 24. 16:03BOOK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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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치매에 걸린 김병수는 소설 초반에 자신이 치매에 걸렸음을 알게되고, 그 순간 과거 연쇄살인범이었던 김병수가 치매에 걸렸음을 나도 인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책에 빠져들면서, 나도 모르게 김병수의 불안전한 기억들을 당연히 완전한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김병수의 기억을 오롯이 믿었다. 그러면서, 부정확하게 끊어진 기억의 퍼즐을 맞추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책을 읽고 있었다. 김병수의 말을 그대로 믿고 페이지를 넘기니 소설이- 쑥쑥- 스펙타클한게, 나도 모르게 과거 연쇄살인범이었던 김병수의 편에서서 김병수가 박주태로부터 은희를 과연 구할 수 있을지 두근두근하며 읽게 되었다. 예전의 살인범과 현재의 살인범과의 대결이라니.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하며.

 

그러다보니, 후반부에 이르러서 '아, 김영하에게 내가 당했구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김병수가 박주태에게 당한 것처럼. 마당에서 누군가의 손이 나오고, 급기야 김병수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문 앞에서 경찰을 마주쳤을 때. 모든 것이 정교하게 계획한 김영하의 계산 밑에 있었음이 드러난다. 소설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반전이 <살인자의 기억법>에 숨어있다.

 

권희철 평론가는 "이 책이 잘 읽힌다면, 이 소설을 잘 못 읽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그럼 나는 꽤나 잘못읽은 것이다. 적어도 소설읽기에서 '잘 못 읽고 잘읽고' 라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내가 느낀 게 장땡이라는 이기주의 마인드라 잘못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으며,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다시 한 번 깨우쳤다. 책을 읽는 내내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치매만 보다가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묘사한 치매를 보니 급이 다르게 치가 떨렸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 치매는 기억에 갇힌 죄수. 소설 초반에는 "연쇄살인범을 동정하게 만들다니, 위험한 소설일세" 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연쇄살인범을 치매라는 병에 걸리게 만든 건 살인의 추억으로 살아가는 연쇄살인범에게 줄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이다. 이게 바로 김영하식 응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