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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기사단장 죽이기] 출간 후, 만 6년 만에 하루키의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출간되었다. 뭐,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작가의 새 책이 나왔다고 챙겨보는 스타일은 아닌데, 역시 하루키 정도면 자발적인 의지가 없어도 출간 소식이 알아서 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전예약해서 읽게 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그러다보니, 책을 수령한지 꼬박 한 달이 되었다. 원래 소설책을 이렇게 질질 끌면서 읽는 타입은 아닌데, 이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려 작가후기 포함 767P. 하루키 책은 글자크기도 크고 자간도 넒은 편인데다 챕터가 많은 편이어서 읽기가 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00p에 가까운 책은 사실 두 권으로 발행해도 무방할 분량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사전 심호흡이 꽤 길었고, 휴일도 많았지만, 압도당하는 책의 두께에 선뜻 가지고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집에서만 홀짝홀짝 읽다보니 어느덧 한달이 지나있었다.

각설하고 그래서 '어땠어?' 한마디로 물어본다면, '역시! 하루키야! 지금까지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듯이 이번에도!' 이렇게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역시나 여전히 하루키의 책은 정말 쉽게 읽힌다. 읽은 기간이 길었으면서 '쉽게 읽혔다고?' 할 수 있지만, 기간이 길어진 건 순전히 나의 게으름에 대한 문제이고, 여전히 하루키의 소설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하지만, 술술 읽히는 재미와 달리 읽으면서도 그 메시지를 생각하면, 자꾸 멈추게 되었다.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그저 소설을 '재미'로만 읽는다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도 재미있다. 그런데, 소설 속에 담겨진 메시지를 찾는 과정이 내게는 좀 길었던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대로 된 메시지를 찾았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물음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1부는 219p, 2부는 696p까지, 3부는 761p의 분량을 봤을 때 2부에서 거의 메인 스토리가 모두 펼쳐지고 1부는 스토리의 바닥을 다지고, 2부에서 펼쳐내고 3부는 에필로그 정도로 봐주면 되지 않을까 싶다.

도입부의 스토리를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17살의 는 고등학생 에세이대회에서 상을 타러 갔다가 16살의 를 본다. 자연스러운 끌림에 너를 알게되고 성장기에 있는 소년이 그렇듯 나는 너만 바라보게 되지만, 사실 너는 이 도시의 사람이 아닌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내가 만나는 너는 도시 안에 사는 너의 그림자이다. 나와 너는 자주 보지 못하는 사이이기에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데, 어느날 갑자기 너의 편지가 끊긴다. 첫사랑을 영문도 모른채 잃은 나는 그렇게 대학생이 되고, 나이가 들어 어느덧 40대. 그 사이 몇몇의 여자들을 만났지만, 여전히 너를 못잊은 나는 벽 안의 도시로 가서 너를 만나기로 한다. 그런데 벽안의 도시에 들어가려면, 내 그림자를 버리고 들어가야 한다. 또한, 다시 벽 밖의 도시로 나올 수도 없다. 그리고 버려진 그림자는 보통 일주일 사이에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벽 안의 도시에 들어가서 10대때 만났던 너를 만나지만, (알고 있었지만) 그 도시에서의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나의 그림자는 역시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데 그림자가 본체인 나에게 이 도시를 나가자고 제안한다. 도시를 나갈 것인지, 머물 것인지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림자만 도시 밖으로 내보낸다. 여기까지가 1부의 이야기이다. 

#병행&교대
알다시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하루키가 30대때 쓴 중편소설을 장편으로 다시 쓴 소설이다. 하루키는 처음에 이 소설을 고쳐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 스토리 하나만으로는 장편소설화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 또하나 전혀 다른 색깔의 스토리를 덧붙여 '동시 진행' 이야기를 만든자는 발상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벽을 사이에 두고 두 도시를 배경으로 인물도 나와 그림자로 나뉘어져 이야기가 동시 다발적으로 펼쳐진다. 때로는 스토리가 병행하다 나중에는 합쳐지고 이어지고 하다보니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것이리라. 또한, 처음에는 나와 그림자의 분리라는 생소한 설정에 낯설게 이야기를 쫓아가다보니 중간 중간의 반전이 신선하고 때로는 전율까지 흐른다. 

#COVID19의 시대
하루키도 작가후기에서 이야기 하듯, 하루키는 이 책을 2020년 3월 코로나가 막 시작했을 무렵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거진 3년만에 책을 마무리했다고 하니 코로나19의 터널을 진입해서 나갈 때까지 이 소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소설 또한 시기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P684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을 인용하면서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콜롬비아의 소설가'로 언급했는데, 읽다보면 벽 안의 도시가 죽은 자들의 공간처럼 보여진다. 대표적으로 벽 안의 도시에는 시계바늘이 없는 시계탑이 있고, 벽 밖의 도시에 있는 죽은자인 고야쓰씨가 차고 있던 시계에도 시계바늘이 없다. 죽은 자의 도시에는 시간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에는 벽 밖에있는 도시에 있는 사람이 그림자, 벽 안의 도시에 있는 자들이 본체로 보여졌지만, 보면 볼수록 벽 안의 도시에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의 영혼, 벽 밖의 도시에 있는 자들이 본체처럼 느껴진다. 또한 이 불확실한 벽은 가벽처럼 경계도 모호하다. 전부 '집 안'이라는 '큰 무덤'에 갇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게 살았던, 생과사의 경계가 모호해진 코로나19시대의 우리 모습아니었을까.

#그래도 역시 사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메시지를 묻는다면, 사실 '딱! 이거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래도 사랑이다. 십대시절 순수했던 사랑의 상대를 잃고 방황하던 내가 옛사랑을 지켜보러 벽 안의 도시로 들어가서 첫사랑을 만나고 나의 그림자와 갈라지면서 벽 밖의 도시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벽 안의 도시의 나의 지위는 소년에게 물려주면서 다시 벽 밖의 나와 만나는 이야기. 잃었던 사랑으로 무의미한 삶은 영위하던 내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 컬러를 띄게되는 이야기.

#그리고 계승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책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와 관련된 직업이 많다. 이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도 예외는 아닌데, 나는 출판 유통 쪽 일을 하다가 벽 안의 도시에서는 '꿈 읽는이', 그리고 벽 밖의 도시에서는 도서관 관장으로 일하게 된다. 벽 안의 작은 도서관에서 '꿈 읽는 이'로 일하던 나는 이 일을 소년에게 물려주는데 이 소년은 벽 밖의 도시에서 뭐든지 읽으면 바로 뇌 속에 새겨버리는 천재 소년이다. 궁극의 개인 도서관이 된 이 소년은 벽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을 물려받는다. 역병이 돌고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도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문명을 지켜내리라는 암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완벽에 가까운 소년에게 물려줌으로써 벽 안의 도시와 벽 밖의 도시는 미묘한 균형감을 이루어 나갈 것 같은 그런 그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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