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샤워캡을 쓰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공허하게 응시하고 있는 태인(유아인)과 

노란색 투명 우비를 입고 어딘가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창복(이재명)

이 두 남자는 겉으로는 트럭에 계란을 싣고 다니며 계란을 파는 계란 장수이지만, 특이한 부업이 있다. 

바로 폭력 조직의 청소부. 사실, 이런 직업 또는 부업이 있을까 싶지만. 

이들은 조직 폭력배들이 정보를 또는 돈을 빼내고 이제는 쓸모없게 되어 죽인 사람들을 산에 묻어주는 일을 한다. 

나름 고인을 애도하는 묵념까지.

이들은 나름의 장례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둘에게 조직의 실장이 특별한 제안을 한다. 

어떤 사람을 하루 이틀만 맡아달라는 것. 

항상 죽은 사람만 대해본 태인과 창복은 당연히 안 한다고 하지만, 협박에 장사 없다. 

약간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장하면 이 허술해 보이는 두 남자는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을 찾으러 갔는데, 그 사람은 바로 11살 짜리 여자아이, 초희였다. 

더욱 난감해진 이둘은 실장에게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해보지만, 엉겁결에 아이를 맡게되고.

이 일의 판을 깐 실장은 곧 조직에서 배신이라는 무거운 죄를 받고 살해당한다. 

졸지에 초희만 맡게 된 태인과 창복은 아이를 돌려 보내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아이를 '데려오기만' 하고 '맡아주기만'했을 뿐인데, 실장이 죽은 후로, 이 둘은 본의 아니게 유괴범이 되었다.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엉켜진 실타래는 점점 더 뒤엉키게 되어 절대 풀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헛된 욕망을 품으면 큰 화를 부른다는 신조를 곧게 믿고 청소부로서 성실히 사는 창복과 

무슨 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말을 하지 않는 태인. 

이 둘은 자기 삶의 그릇을 잘 알고 분수에 맞게 살고 있었다. 

분명 그 방식은 불법이고, 선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째서인지 이 둘을 '나쁘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당을 응원하게되면 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되어 불편하지만

그래도 태인과 창복에게는 그 불편함을 감내하게 된다.

<소리도없이>의 주인공들은 나쁜 놈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측은하고 선량하다. 

이들에게 선과 악. 이중잣대를 들이대기가 싫어진다.

시체를 유기하는 건 분명 불법이지만, 이들에게는 라면을 먹는 것처럼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순진한 악당들에게 초희는 부담스러운 존재이지만, 

가족에게 쉽게 돌려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의 선택지를 욕할 수 만은 없게 만든다. 



<소리도없이>는 주인공들이 의도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데,

이는 많은 한국 영화들의 익숙한 문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안의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변주하고 공간을 도시가 아닌 농촌 마을로 배경을 바꿈으로써 낯선 미장센을 만들어냈다. 

우리 농촌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싶다.

스톡홀름증후군을 떠올리게 하는 초희와 태인의 투 샷을 보고 있으면, 얼핏 고레에다히로카즈의 영화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소리도없이>가 여느 한국 영화와 다르게 감독만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이 느껴진다는 데에는

장면을 꽉 채우는 음악도 한몫한다. 

어떻게 보면, 사건은 익숙하게 흘러가지만

관객이 느끼기에는 낯설다.


영화는 나름의 엔딩으로 마무리하지만, 엔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 않을까 싶다.

<소리도없이>를 보기로 마음 먹은 이유도 유아인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유아인은 대사 하나 없이 말로 표현하는 감정보다 더 찐 감정을 표현해주었고, 

안정적인 유재명과 뉴페이스 문승아의 연기가 이 영화를 만든 힘이지 않을까 싶다.

그 셋이 만들어내는 페이소스가 영화를 보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