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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책 표지

어쩌다 보니 올해 처음 읽은 소설이 <고래>가 되었다. <고래>가 2004년에 출간되었으니 출간된 지 20년 만에 이 책을 읽게 된 셈이다. 작년에 맨부커상 후보에 올라서 그제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수상이 불발되고 그리고도 한참을 지나 입원한 아이 병간호 할 때 할 일 없어서 읽기 시작한 게 이제 마무리를 지었다.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 기록해 놓고 싶은 습관이 있어서 살짝 남겨본다.

<고래>는 국밥집 노파,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여성 중심의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금복과 춘희는 모녀지간이지만, 국밥집 노파와는 혈연 관계는 아니나 전체 서사를 관통하여 등장하기에 국밥집 노파는 <고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의야기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시간적 배경은 1950년대 6.25전쟁 후 무렵부터 90년대를 아우르는 것 같지만 딱 드러 맞지는 않고 공간적 배경은 사실 ‘평대’라는 ‘웰컴투 동막골’에 나올법한 강원도 두메산골 어디메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또한 딱히 드러 맞지는 않는다. 한국의 근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산이나 바다가 보이는 한국의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가 겪어온 시대에 소금 한 스푼, 후추 톡톡 버무려 알 듯 모를 듯 한 배경을 하고 있다. 그래도 읽을 때는 한국이라고 생각하고 읽게 된다.

배경이야 어찌되었든, 최근 문학동네 3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개정판은 자간이나 행간, 글씨크기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나로서는 책을 폈을 때 옛날 느낌이 물씬 나기는 했다.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자간이나 행간도 빼곡하고 글씨크기도 작아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작하기 전에 한번 심호흡이 필요했다. 그런데, 딱 30페이지. 1부 부두의 공장, 귀물 정도 읽고나면 술술 넘어가기 시작한다. <고래>의 문체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자투리 시간에도 나 스스로 책을 펴 들게 되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실로 오래간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기는 했다. 아니면, 옛날 느낌의 소설을 읽어서 옛날 사람인 내게 <고래>가 소설다운 소설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간만에 몰입해서 순수하게 소설의 재미를 느끼며 읽은 소설이다.

지지리도 복 없이 태어나서 시골마을에서 탈출만 꿈꾸던 금복이 생선장수와 걱정이, 칼잡이를 만나면서 이제 좀 삶이 피려나 했더니, 바로 반전이 생기면서 바뀌어가는 그녀의 인생을 읽고 있노라면 50편 대하드라마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마지막 수련이까지 함께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고 나면 한국의 근현대사에 이런 사람 꼭 한 명쯤은 있을 것 같은 인물을 본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춘희의 인생은 또 한번 눈물 콧물 쏙 빼면서 읽게 되는데, 춘희와 금복은 외모로는 어디 하나 닮지 않은 모녀지간이지만 결국 사막에 떨어져도 모래를 파먹고 살아남을 것 같은 강인한 생명력과 의지력이 닮았다. <고래>가 재미있었던 건 선이 굵은 여자서사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이야기도 재미지게 할 것 같은 작가의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풀어가는 찰진 이야기가 책을 읽다 보면 옆에서 오디오북으로 이야기해 주는 느낌이다. 또한, 대하드라마 풍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인물들의 성격이나 특징,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은 판타지적 요소가 적절히 가미되어 몰입을 더하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작가의 이력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평론가들이 <고래>에는 신화, 영화, 민담 등등이 모두 섞여있다고 하는데 정말 읽다 보면 인물과 사건에 다양한 장르들을 섞고 버무려 놓았다.

1부 부두를 읽을 때 생소한 단어들이 많이 나와 당최 의미를 추측하는데 한계를 느껴 사전을 찾아보면서 작가의 단어력에 대해 놀랐는데 3부로 오면서 춘희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 때의 단어들은 편안하다고 느껴졌는데, 뒤에 작가 인터뷰를 읽어보니 이것 또한 의도였다고. 옛날 사람인 금복을 이야기할 때는 일부러 옛날 단어를 사용하고자 했고, 딸인 춘희를 이야기할 때는 요즘 단어를 사용하고자 했다니, 작가의 빅픽처가 느껴진다.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의 심사평을 보면 <고래>는 기존 한국소설의 특징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하는데, 내게 소설은 의미를 찾기보다는 재미로 읽기 때문에 ‘그렇게 다른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고래>가 출간된 당시를 감안하면 그 당시의 소설들과는 달랐을 수도 있겠다 싶다가도. 오락가락 하게된다. 어쨌든 내게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고 <고래>는 무게감도 있으면서 재미도 있기에 게다가 <고래>가 올해 처음 읽은 소설이라니 출발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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