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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오랜만의 신작 <작별인사>. 장편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로 9년 만이라고 하니 그만큼 반가움이 앞섰다. 

원래 이 책은 구독형 전자책 서비스 플랫폼의 의뢰로 쓴 중편 소설의 분량을 수정하고 다듬어서 단행본으로 출간하여서 그런지, 때로는 4-5P의 짧은 챕터로 구성이 되어 있길래 김영하 작가의 소설치고는 '낯설다' 싶었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작별인사>는 '휴먼매터스'라는 인공지능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아빠와 그의 아들 철이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아빠는 철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치고 있는데,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 철이와 밖에 잘 못 나가게 하는 아빠로 인해 철이는 때로는 아빠가 자신을 너무 과보호하는 게 아닌가 의아해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철이는 알 수 없는 정부 요원으로부터 자신이 '무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위치를 알 수 없는 무등록 휴머노이드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선이와 민이를 만나게 된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철이에게 휴머노이드 수용소는 정체성의 혼란을 넘어 생존 자체의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데...

<작별인사>는 인공지능 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사회,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육안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그러한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들의 팔, 다리, 장기 하나쯤은 이미 인공지능의 손을 빌린지 오래고 이 세계에서는 순수한 사람과 휴머노이드의 경계가 모호해져 버렸다. 이러한 사회가 된다면, 결국 인간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자연스럽게 인공지능, 또는 기계지능의 시대로 변모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인간은 늘 미지의 세계를 꿈꿔왔다. 늘 외계인을 궁금해하고 이 드넓은 우주에서 고도로 발전한 생명체가 지구인 밖에 없는 건 아닐 거라며, 궁금해했다. 그러면서, 정작 왜 다른 미지의 생명체들이 지구에 방문하지 않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결국 그 행성들도 기계 지능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이상 다른 행성을 탐험할 이유가 소멸했기 때문이 아닐까? 좁은 지구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러다보니 부족한 자원이 생기고 그래서 대안을 찾아 다른 행성에도 기웃거리고 하는 건데, 효율 높은 기계 지능의 시대에 과연 다른 행성을 탐험하고 자원을 확보할 이유가 있을까? 무섭고, 두렵지만, 꽤나 고개가 끄덕여지는 인류의 미래이다. 김영하 작가는 이러한 인류의 미래에 '인간'이 어떻게 '인공지능 또는 기계지능'과 다르게 인간다울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처음엔 그저  그들을 흉내냄으로써 안전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점차 그들과 나 사이에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들의 관절은 연골과 윤활액 대신 인공적으로 합성한 유기화학 제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중략)...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중략) 내가 완벽하게 기계의 흉내를 내고 그리고 언젠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어떤 것들, 예를 들어 윤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 저버린 채 냉혹하고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록 내 몸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두개골 안에 뇌수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인간일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교육에서 인간은 늘 '인간다움'을 강조해왔다. 결국 이렇게 될 미래를 미리 걱정해서 그런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발전할 수록 인간은 자연스럽게 인간다움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어서 강조해온 건지 인간의 교육에서 우리는 늘 우리가 인간이고,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런데 그때의 교육은 감히 로봇을 염려한 교육이 아니라 '금수'를 염려해서였다.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는 '로봇'과 차별화되기 위해서 '인간다움' 교육받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가 이다지도 힘들단 말인가.

최박사는 과학에서 왜 의미를 찾아? 인류는 언제나 최신 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며 진화해왔지 의미를 찾아 진화한게 아니었잖아? 진화에 의미나 목적 따윈 없었어. 절묘한 우연들이 중첩된 것뿐이었잖아.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것들을 설계한 건 우리지만 우리도 기계에 맞추기 위해 우리 자신을 꾸준히 변화시켜왔어."

과학자는 항상 자신의 연구에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목적은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나 다른 상황들과 만나고 합쳐지면서 의도하지 않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삶은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하는 거야. 그걸 믿어야 해. 그래야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거야."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쌓고 쌓아서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것일까?

이야기는 오히려 인간을 더 집단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태어난 인간들은,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야기라는 매우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발명했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이 겪는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은연중에 말합니다. 가장 많은 인간이 믿었던 두 종교는 모두 하나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중략)"

'이야기'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가장 전염성이 높은 바이러스가 아닐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거짓된 이야기가 어느 순간 진실처럼 떠돌다가 죄없는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는 대학살이 역사에서 반복되면서 이를 증명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를 금지시켜야겠다는 어이없는 방향으로 넘어가지는 않겠지. 이야기는 도구일 뿐이니까.

처음에 민이를 주문했던 인간들과 똑같은 짓이잖아. 그리고 나를 기억도 못할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고도로 발전한 휴머노이드와 인간을 구분 짓는 것은 육안으로나 정서상으로나 어려워지겠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남을 '인간다움'은 '서로 기억해주고 그리워하는 마음' 아닐까. 물론 휴머노이드인 철이는 선이를 그리워하는 단계까지 갔으니 이조차도 무의미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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