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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를 늦게나마 재미있게 읽어서 손원평 작가의 신작 소설 [튜브] 또한 기다려졌다. '변화가 필요한 당신을 위한 단 한 권의 소설'이라는 책 뒷편의 홍보 문구는 최근 방향을 못 잡고 제자리 헤엄을 치고 있는 내 마음을 솔깃하게 했다.

[튜브]는 한마디로 쫄딱 망해서 거의 반노숙자가 된 50대 남자 김성곤 안드레아가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삶에 실패한 50대 남자의 인생역전 이야기라는 생각에 소설 초반 몰입했던 마음이 금세 시들시들해져서 진도가 더디게 나가기는 했다. 그런데,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튜브]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인생역전' 스토리가 아닌 '변화'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면서 엔딩까지 단숨에 읽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여전히 진부한 스토리일 수 있지만, 손원평 작가의 인물 감정에 대한 소름끼치도록 적확하고 세밀한 묘사, 우린 인생에 대한 공감 가는 시선이 [튜브]를 붙들고 있게 만들고 읽고 있는 내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우리의 인생에 바람 빵빵 넣은 튜브하나 있으면 좀 더 편하게 인생을 살 수 있듯이 [튜브]는 내게 정신적 '튜브'가 되어 주었다.

아래는 [튜브]를 읽으며 가슴 속에 새긴 주옥같은 글귀를 남겨 보았다. 

"사실 뭔가를 나쁘게 바꾸는 건 아주 쉽다. 물에 검은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쉽고 빠르다. 어려운 건 뭔가를 좋게 바꾸는 거다. 이미 나빠져버린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세상 전체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대단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단한 일을 우리 김성곤 안드레아는 하나씩, 하나씩 해낸다. 자세, 표정, 말투 마치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하나둘씩 배워가듯이 김성곤은 조금씩 변화하는 자신의 삶에 행복을 느낀다.



"삶도 그랬다. 인생에는 더러 반짝이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삶은 어둡고 차갑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 같았다."  "오늘과 내일은 복사한 것처럼 똑같았다. 답답했다. 어느 날 그러한 권태의 이유가  '잘 나가는 건 내가 아니라 회사이기 때문'이란  걸 깨닫고 난 뒤 그의 심장은 세차게 쿵쿵 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생각때문에 회사를 뛰쳐나오게 되지만, 막상 뛰쳐나오면 깨닫는다. 회사 안에 있었기에 그나마 내가 희미한 반짝임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뭐든지 한번에 한 가지씩만 하는 겁니다. 밥 먹을 땐 먹기만, 걸을 때 걷기만, 일할 땐 일만. 그렇게 매 순간에 충실하게 되면 쓸데없는 감정 소모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하나. 생각의 스위치는 끄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세요. 우린 항상 무언가를 판단하느라 에너지도 감정도 너무 많이 쓰고 있잖습니까. 그러다 보면 자꾸만 소모적인 생각이 날아들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돼요."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오히려 단순해지는 게 답인 것 같다. 한 번에 하나씩.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


"운명은 만들어기 나름인 거야. 난 아닌 것 같아. 벌써 다 틀린 것처럼 느껴져. 길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난 아무리 용을 써도 어차피 애초에 정해진 길 위에 있는 거야.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상품처럼. 사실 무슨 라벨이 붙여질지는 처음부터 다 정해져 있었는데 컨베이어 벨트가 막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혹시나 하고 헛된 희망을 품다 망하는 거지"

살다 보면, 정해진 답지 위에서 괜히 나 혼자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 발에 묶인 쇠사슬이, 또는 미역줄기 때문에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그런 느낌. 하지만, 그래도 확연히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발목을 둘러쌓고 있는 미역줄기를 서서히 느슨하게 만들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발버둥을 계속 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인생인 것 같다.


"사람은 자꾸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거든요. 돌보다 더 단단하고 완고한 게 사람이죠. 바뀌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원래 모습대로 되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왜? 그게 편하니까. 그 단계에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은 정말 드물죠. 그 시간까지 온전히 겪고 나서야 비로소 원래의 자기 자신에서 한발자국쯤 나아간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람은 정말 바뀌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인이라면, 바뀐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일시적으로 나쁜 습관을 고칠 수 는 있지만, 결국 '다 고쳤다'는 안도감을 갖는 순간 나쁜 습관은 다시 스멀스멀 내 속을 파고든다.


"인생이 운전 같은 거라면 차를 운전해봐. 적어도 네 차는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네가 원하는 속도만큼 갈 거야.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질주하고 싶을 때 달리면서"

이런 이유에서 운전을 좋아하는 것이었을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운전뿐이어서? 


"삶의 가장 큰 딜레마는 그것이 진행한다는 것이다. 삶은 방향도 목적도 없이 흐른다. 인과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종종 헛된 이유는 그래서이다. 찾았다고 생각한 정답은 단기간의 해답이 될지언정 지속되는 삶 전체를 꿰뚫기 어렵다. 삶을 관통하는 단 한 자기 진리는, 그것이 계속 진행된다는 것뿐이다.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김성곤의 행운도 삶의 진행 속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구름이 우연히 빚어낸 신의 형상을 바람이 금세 뭉개버리는 것처럼, 짧고 허망하게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성곤이 깨달은 건 삶의 불가해함과 고정성이었다. 행운이 사고처럼 다가와 누군가를 마취시키면 불행이 여기 내가 있다고 선언하며 닥쳤다. 행운이 수고했지, 애썼어,라고 짧은 위로를 건네고 나면 불행이 그럼 이건 어때, 라며 단계와 강도를 높여 삶이라는 벽을 넘으려는 자들을 깊이 골짜기 아래로 떨어뜨렸다."

"세상에 던져졌으니 당연하지요. 태어나길 원하지도 않았는데 좁은 배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갑자기 발가벗겨진 채로 세상에 던져졌잖아요. 인간은 탄생부터가 외롭고 불안한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슨 수로 알겠어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일단 쥐어보는 거지요."

드라마는 언젠가 끝나지만, 인생은 죽지 않고서는 끝날 수 없기 때문에 화려한 엔딩을 기대하기 힘들다. 화려한 성공 후에 지난한 삶이 계속되고 그러다 운이 안 좋으면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다시 따스한 햇빛을 받게 되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다 합쳐 인생이 되는 것이기에. 



"영원토록 따뜻한 바닷물 위에 아무런 노력도 없이 둥둥 떠 있는 속 편한 삶이란 없으며, 혹여 그 비슷한 것이 어딘가 존재한다면 장담컨대 그 삶의 이름은 행복이 아니라 권태와 무기력일 것이다. 우린 실내 수영장이 아니라 풍랑 속에 살고 있기 깨문이다. 언젠가 또 비바람을 만나야 하고 그러면 또 헤쳐 나와야 한다."

그래, 인생은 적당히 단맛과 짠맛이 섞여있어야 인생이지. 달기만 하고, 짜기만 하면 심심하거나, 절망의 늪에 빠져있겠지? 적당히 단짠단짠한 내 인생에 소소한 변화를 만들며 살아내면 그게 인생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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